2023년 회고
벌써 세 번째 회고록을 썼다 지우고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몇 가지 템플릿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회고'도 하고 싶지만, 무엇보다 글을 쓰고 싶다. 글은 쓴는 맛이 있어야 하는 법! 단순히 정해진 템플릿에 맞게 빈칸을 채우는 건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는 아닌 것 같다. 그리하여 다소 중구난방일 수 있으나,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내용을 담은 23년 회고록을 작성해 보기로 했다.
📆 월간 회고
1~2월 :
교환학생을 마무리하던 시기이다. 이때 나의 인생 여행지이자, 지금도 노트북 배경화면인 [스페인-포르투갈]을 다녀왔다. 여행에 다녀와서 한 학기동안 사귀었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룸메이트인 잉카가 기차역까지 데려다주며,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교환학생을 통해 깨닳은 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자면,
1) 나는 나로 존재하는게 편하며, 누군가를 흉내낼 필요 없다. 특히 외향적인 성격을 부러워하고 이를 따라 하려 했었는데, 조용한 성격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굳이 성격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즐거운 인생을 살려면, 내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내가 직접 여행, 파티를 계획하며 깨닫게 된 점이다. 가만히 있으면서 '내 인생은 왜 이리 지루해'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즐거움은 내가 만들어내야 한다.
3) 나는 생각보다 더 작고 하찮은 존재이다. 반드시 성공하는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나는 유일한 소중한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어깨에 힘을 빼고 살아도 된다'.
하지만 이때 깨달은 게 무색할 만큼 나는 남은 10개월을 힘들게 산다. 조금 느슨하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분명 톡톡히 배우고 왔는데, 나는 아직 뒤처지는 게 너무 무섭다. 아직도 내 장점보다는 단점을 바라보며 조급하게 산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살면 좋을 텐데, 아직은 내가 가진 것들을 다 포기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조르바와 같은 삶을 동경한다! 물질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람. 가진 게 없어도 예술을 사랑하며 사는 집시 같은 삶. 누군가 내게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만 그렇지, 실제로는 뒤쳐지는 게 너무 두렵다. 안락한 삶이 소중하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에 영향을 준 것들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3월로 넘어가 보려 한다.
3월 :
3월에는 <자운영>이라는 독서 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다. 거기서 '달과 6펜스'라는 책을 읽었다. 여기서 달은 영혼과 본질적인 감성의 세계를,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 책의 화자는 '6펜스'의 세계에 살다가 한순간에 '달의 세계'로 탈출한 스트릭랜드의 삶을 기록한다. 왜 안락한 직업과 가정을 두고 갑자기 빈털터리 화가가 되었는지 묻는 말에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반면,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예술을 동경하지만, 6펜스의 세계에서 그 달빛을 훔쳐보는 것에 만족하며 산다. 이 책을 보며 나도 자유와 예술 vs 안락한 삶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을 하고,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냥 달의 세계에 한 발자국, 6펜스의 세계에 한 발자국을 걸치고 살련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예술을 쫓을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냥 내 삶에 내가 만족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자유 vs 안락]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는 그만하기로 했다. 나는 그냥 계속 책을 읽고, 예술가들을 동경하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 외에 3월에는 연합 IT 동아리인 SOPT에 지원을 했다가 떨어졌고, 첫 자취를 시작했다.
4월 :
4월에는 내가 지금도 아주 좋아하는 두 여성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들이다. 밀리의 서재로 책을 읽다가 당시 베스트셀러에 있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게 되었는데, 책을 너무 잘 쓰셔서 팟캐스트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특히 팟캐스트인 <여둘톡>은 2023년 내게 많은 영향을 줘서 회고록에 꼭 포함하고 싶었다.
두 작가님은 각각 잡지 에디터, 카피라이터 출신이시고 현재 40대 중반이시다. 나보다 먼저 커리어를 시작하신 분들이셨기 때문에 커리어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또 커리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계절을 즐기고, 삶을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책과 영화에 대한 리뷰도 해주셔서 팟캐스트를 들으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팟캐스트 <여둘톡>과 독서 토론 동아리 <자운영>을 통해 '좋은 대화란 무엇인지'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배운 좋은 대화의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발언권이 균등하게 주어짐
2) 다른 사람들의 깊은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주제를 제시
3) 대화 도중 다양한 어휘를 사용
4)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
5) 눈을 마주치며 대화
특히 여둘톡을 들을 때는 두 작가님들의 대화를 그저 듣는 입장이었지만, <자운영>에서는 좋은 대화에 실시간으로 참여하고, 나도 그것을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매주 토론 시간이 기다려졌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여러 사람과 대화하는 게 조금 기 빨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대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걸 주도할 수 있는 스킬을 얻고 나니 대화가 참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5월~9월 :
이 시기는 나의 암흑기이며,.. 동시에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죽고, 개발자로서의 나만 존재하던 시기였다. 정말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지인들이 보자고 해도 '제가 지금 공부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며 약속을 거절했다. 손목과 손가락 관절이 너무 안 좋아져서 하루종일 보호대를 끼고 공부했고, 자기 전에는 파스를 붙였다. 난생처음 관절 진통제를 먹어봤다. 관절을 내주는 대신 스프링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다.
10월:
10월도 5~9월의 연장선으로 공부밖에 없던 한 달이었지만, 그중에도 특별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옥토버 아카데미>였다. 옥토버 아카데미는 '자기 탐색 기반 취준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N사 개발자이셨고 학교 선배이신 호균님이 후배들을 대상으로 진행하시는 프로그램이었다.
옥토버 아카데미는 2023년 나의 개발자 정체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경험이었다. 먼저 개발자의 길을 가신 호균님의 모습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큰 자극이 되었다. 게다가 호균님은 자신의 커리어를 설명하시면서 '나는 개발하는 게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꼭 하시곤 했다. 이는 그동안 개발을 '밥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내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개발을 재미있어 할 수 있다니..!
또 옥토버 아카데미에서 하는 자기 탐색 검사들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동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나의 키워드로 선정될 만큼 '자유'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 강점에 대해서도 검사를 했는데, 최상위 5개가 순서대로 [지적사고 / 수집 / 복구 / 발상 / 집중]라고 나왔다. 한마디로 생각이 깊으면서, 관심 분야가 넓고,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이며, 집중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점 코칭을 통해 나의 이런 성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깊게 파고드는 게 강점이기 때문에 하나의 코드를 작성하더라도, 그 기본 원리를 생각하는 게 남들보다 쉬운 사람이다. 그래서 기술 블로그를 작성할 때도 남들처럼 매뉴얼만 적는 게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것까지 정리한다면 좋은 포트폴리오리오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코칭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탐색하고, 이를 기반으로 취준 전략까지 세우고, 개발자 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11월:
11월은 절망의 한 달이었다. 이때쯤 코인노래방을 자주 갔는데, 노래를 부르러 간 게 아니라 울러 갔다...ㅎ 코인 노래방에서 울면 엉엉 소리 내도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찍던 11월 한 달 동안 애용했다. 특히 나를 절망하게 했던 것은 <우테코 프리코스>였다. 프리코스를 제출하고 나서, 다른 지원자들의 코드를 볼 때면 얼마나 기가 죽던지.. 스스로 개발을 너무 못하는 것 같아서 '여기가 내 한계인가?'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일을 벌여서 막상 프리코스에 최선을 다하지도 못했다. 프리코스를 제출하고 나서 붙을 거라는 기대도 되지 않아서, 기억 한편에 밀어 두고 기말고사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중 하나가 '클라우드 컴퓨팅' 수업에서 진행한 클라우드 프로젝트였다. 개발과 팀플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그때, '이번 팀플만큼은 양보 없이 내가 하고 싶던 거 다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갔던 대회, 공모전에서 단 한 번도 수상한 적이 없다. 그리고 항상 대회가 끝나면 '내가 ㅇㅇ 역할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를 했기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독단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일이 많더라도 다른 사람 안 맡기고 내 주관 100%인 프로젝트를 해보자!!라는 다짐을 했다.
한마디로 내 능력에 대한 실험이었다. 다른 사람이 개입되지 않고, 오로지 내 판단만으로 대회에 나간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실험. 그렇게 아이디어, 백엔드 개발, 발표 자료 만들기, 발표 모두 내 힘으로 해내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5명의 팀원 중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인원이 3명이라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12월:
12월은 수확의 달이었다. 클라우드 수업의 9개 팀에서 가장 잘하는 2팀을 뽑아서 'aws 루키 챔피언쉽'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했는데, 우리 프로젝트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프리코스 1차 합격, 최종 코딩 테스트까지 합격, aws 루키 챔피언쉽 최종 수상까지 좋은 소식이 이어져갔다.
사실 클라우드 컴퓨팅 수업에서 최종 발표를 한 날도 나는 어김없이 코인 노래방을 갔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너무 못한 것 같아서, 내 스스로가 미워서 울었다. 그리고 우테코 최종 코딩 테스트를 보고 나서도 울었다. '나는 한번도 코딩을 잘 해본적이 없어!' 라고 생각했다🥲
그정도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너무 자신이 없었는데, 둘 다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니 내가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한계는 아직 오지 않았나보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 총평
1월부터 12월까지를 되돌아보니, 올 해가 참 기승전결이 완벽한 해라고 느껴진다.
기 : 삶의 가치관을 세우고, 문학을 즐긴 1~4월
승 : 앞만 보며 백엔드 공부를 한 5~10월
전 : 절망에 빠져 우울했던 11월
결 : 노력한 결과를 수확한 12월
📫 2024년 목표
1) 진심으로 개발하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게 개발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고, 나는 문학을 읽을 여유만 보장된다면 okay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진심으로 개발을 좋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개발의 재미를 느끼고 싶다. 포트폴리오를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 나의 흥미 목적으로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
2) 독서 토론 동아리 가입하기
4월 이후로 책을 단 한. 권. 도. 읽지 않았다...ㅎ 그러다 보니 속이 메말라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라고 한 것처럼, 나는 읽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책을 읽지 않으면 여러 곳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살 수 없다. 내가 아닌 채로 살아가게 된다. 살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독서 토론 동아리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제로 책을 읽기 위해서!
3) 졸업하기
사실 작년에 '2023에는 졸업하기 ^0^'를 당연하다는 듯이 써놨지만... 졸업은 쉬운 게 아니었다. 아쉽게도 한 과목에서 F를 받아서 졸업하기 위해서 딱 전공 3학점이 필요한 상황이다.. 우테코 수료 후 학부연구생으로 전공 3학점을 채워서 25년 2월 졸업자로 회사에 입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24년 1월 1일에 언니랑 사주를 보러 갔다. 올해는 꼼짝없이 공부만 하는 해라고 한다. 그래도 올해 열심히 공부하면 하반기에 대기업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비정규직이더라도 꼭 대기업에 서류를 넣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작년에도 엄청 열심히 공부했는데, 올해도 공부만 한다고요?'라고 물으니 작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그러셨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내게 공부만 하라니..! 뭐 24년은 우테코를 열심히 해야 하니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공부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더욱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