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 회고록
Intro.
한국에 도착하면, '교환학생 어땠어?'라는 질문을 많이 들을 것이다.
상대는 예의상 물어본 것일 텐데,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거나,
너무 길게 이야기하게 될까 봐 케쥬얼하게 '좋았지~'라고 답할 것 같다.
그래서 이 회고록에서는 '교환학생 어땠어?'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제한 없이 풀어보고 싶다.
경험이라는 단어
많은 교환학생들이 교환학생을 통해 얻은 최고의 가치를 '경험'으로 꼽는다.
정말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는다.
경험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아우르지만,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얻었는지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교환학생을 가기 전, 수기를 찾아볼 때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라고 일축하고 넘어가는 글을 볼 때면
'대체 그 경험이라는 게 뭔데?'라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회고록에는 모두가 말하는 그 '경험'이라는 게 뭔지, 직접 겪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내가 생각하는 교환학생의 본질에 대해 적어보겠다.
교환학생을 통해 얻은 최고의 가치는 '경험'이다.
이 회고록에서는 그 경험이라는 게 무엇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교환학생의 본질
조금 더 깊게 들어가서, 내가 생각하는 교환학생의 본질은
'경험을 통해 생각의 틀을 깨고, 생각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기존 것이 깨지고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는 순간이 참 좋았다.
특히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이 내가 주체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전 생각을 수월하게 내려놓을 수 있다.
교환 기간 동안 겪은 경험들은 내 안에 고착화된 무의식을 부수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걸 깨닫자 정말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작은 무의식이라 할지라도,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은 내게 있어 최대의 수확이다.
[생각 - 행동]은 [물감 - 그림]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물감을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갖고 있지 않은 물감이 들어간 그림은 절대 그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행동은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교환학생을 통해 나는 더 많은 물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물감들을 통해 전과는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교환학생의 본질은 '경험을 통해 생각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어떤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 어떻게 생각이 확장되었는지를 적어보겠다.
K-pop & 떡볶이 파티
가볍게 시작해 보자면, 내가 주최했던 k-pop 파티, 떡볶이 파티가 기억에 남는다.
학기 초반에 여러 친구들을 만났지만, 연락을 이어갈 마땅한 계기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내가 한국 음식 해줄게!' 하며 접근했다.
그렇게 떡볶이는 사교의 도구(?)가 되었고 교환 기간 동안 10번이 넘는 떡볶이를 해주었다.
교환이 끝날 때 즈음, '영서는 내가 아는 교환학생 중에서 친구 사귀려는 노력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I 성향 90%인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성격이 변했다는 것에 나도 놀랐었다.
20명이 넘게 왔던 케이팝 파티도 의도는 똑같았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외국인 친구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그 파티를 주최하면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겠지? 후후..'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파티는 조를 나눠서 k-pop과 관련된 게임을 하는 방식이었다.
게임을 기획하고, 음악을 선곡하는 등 모든 과정을 준비했다.
이런 방식의 파티는 외국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들에게 굉장한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의도했던 대로, k-pop 파티는 교환 기간 내내 가장 친하게 지냈던 Emilia와 급속도로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의 확장
교환학생을 오기 전, 나는 내 삶에 대한 불평이 많았다.
'나는 스터디카페를 갔다 오면 하루가 끝나는.. 그런 재미없는 삶을 사는데, 왜 다른 사람들의 삶은 다채로운 거지?
이렇게 사는 게 정답이 아닌가? 공부 때려치울까?' 하며 회의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행복한 시간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직접 해보니 크게 어렵지 않더라 하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적어보니 참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기쁨과 함께 후회가 몰려왔다.
내 행복은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건데, 이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건지...
왜 나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고 살았는지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지루하고 힘들기만 한지 투덜댔던 나는
사실 투털 댈 자격도 없었던 것 같다.
나도 나만의 뭔가를 만들고 나만의 인생을 잘 살기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만의 행복들을 select 해나가자.
- 그때의 일기 내용 -
2023년의 목표로 [한 달에 한 번 영화관 가서 영화 보기], [절기에 맞는 음식 먹기] 등을 설정했다.
이런 목표를 넣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삶을 채워나가겠다는 다짐의 일환이었다.
교환학생에서 행복한 경험을 할 때마다 동시에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 삶이 불행하다고 불평했던 나의 그 좁은 시야가 불쌍해졌다.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확보하는 사람이 되었다.
프라하에서 만난 가이드
Emilia와 함께 프라하 여행을 갔을 때였다.
프라하 성으로 가기 위해 가이드 투어를 들었는데, 그때 가이드가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미국에서 원숭이🐵를 연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삶을 180도 바꾸고 싶었어요.
You know,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맨몸으로 프라하로 왔고, 가이드 일을 시작했습니다.'
짧게 2-3분 정도 이야기했지만, 나에게 그 이야기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Emilia에게 '저 사람 저렇게 진로를 바꾸다니 진짜 대단하다, 용감하네'라고 말했다.
하지만 Emilia의 대답이 더 충격적이었다.
Emilia는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직업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흔한 일이다.
우리 엄마는 직업을 13번 정도 바꿨고 나는 전공을 2번이나 바꿨다'라고 말했다.
생각의 확장
먼저, 삶의 밑바닥을 찍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시작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대한민국에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으면,. 나도 다른 나라 가서 가이드나 하지 뭐.
그렇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크게 틀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신러닝에서 자바 서버 쪽으로 진로를 바꿨을 때 내가 잘못 판단한 건 아닐지 불안해했다.
그런데 원숭이 연구원에서 프라하 가이드로 직업을 바꾼 것에 비하면...
너무 아무것도 아닌 변화이지 않나.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겁먹었었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① 완전히 망해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② 급격한 변화를 줘도 아무렇지 않은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굳이 참을 이유가 없어졌다.
나는 삶의 긴장도가 굉장히 높은 사람인데, 걱정했던 것들이 대수롭지 않아졌다.
한 번뿐인 삶, 별로라고 생각하면 방향을 틀면 된다. 그래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내 삶의 키는 내가 쥐고 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자.
그러다 망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프라하로 날아가면 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내가 갖게 되었다.
에밀리아가 이 글을 보면 '너 당연한 걸 왜 그렇게 장황하게 쓰니~'라고 하려나..😂
그 정도로 에밀리아의 사고방식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베네치아로 가는 길
런던 여행을 했을 때, 펍에서 만난 동행이 이렇게 말해줬다.
'영서야, 나는 진짜 부러운 게 없는 사람인데, 너 나이는 정말 부럽다.
지금은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교환 기간 동안 읽은 책 <역행자>에서도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은 지금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수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두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움찔했다.
교환 학생 온 시간을 '다른 동기들에게 뒤처지는 시간'으로 생각해서 친구들이 파티에 불러도 가지 않고
혼자 방에서 자바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로 여행을 갔을 때도, 그 시간 동안 공부를 못하니까
오가는 길에 버스에서 강의를 들으며 갔다.
베네치아로 가는 버스는 새벽 6시 ~ 오후 2시, 그라츠로 돌아오는 버스는 밤 10시~새벽 4시 30분 버스였다.
모두가 자고 있는 동안 나는 레드불을 마시며 영한님 강의를 들었고, 풀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베네치아를 여행했다.
나는 그게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의 확장
사실 이 경험들로 얻은 깨달음은 2022년 회고록에도 썼었다.
전에 읽었던 여행 에세이를 떠올렸고,
거기서 빨래를 걱정하느라 산티아고 순례길을 즐기지 못했던 남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책에서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강의에 집착하기까지의 나 자신'을 돌아봤다.
나한테 더 중요한 게 뭘까. 교환학생에 와서 새로운 것을 경험할 시간에 강의를 듣는 것이 정말 맞는 걸까.
나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호카곶에서의 생각의 확장
그렇게 시작된 '나를 돌아보는 것'에 대한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환 마지막까지 그 고민을 끌고 갔다.
종강 후, 한국으로 귀국하기까지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스페인 & 포르투갈을 여행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여행인 포르투갈 여행에서 나는 서쪽의 끝, 호카곶이라는 장소를 들렀다.
책 <매일을 헤엄치는 방법>에서도 나왔던 곳인데, 작가는 호카곶에서
'점보다 작은 내가 여기까지 왔어, 앞으로는 더 나아가도 괜찮겠어'하는 용기를 얻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뭔가 큰 것을 깨달아 갈 줄 알았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호카곶으로 갔다.
그런데 내가 호카곶에서 얻어간 것은 용기가 아닌, 후회였다.
호카곶에 부딧치는 파도처럼. 파도처럼 밀려드는 후회.
호카곶에서 끝이 안나는 수평선을 보았다.
세상은 얼마나 넓은 걸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이길래 서쪽의 끝에 왔는데도
내 작은 시야로는 저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없는 걸까.
이 바위들은 파도가 부딧치며 만들어진 것이겠지, 얼마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하며 세상의 넓음을 감탄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짜증이 몰려왔다.
나는 이렇게 작은 존재인데, 내가 돌아버린 행동을 해도 이 지구에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텐데,
나는 뭘 걱정하면서 아등바등 살았던 거지?
나는 뭘 위해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더라?
(당시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깟 몸무게가 뭐라고 나는 나를 학대했던 거지?
내가 너무도 작은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내가 그전까지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다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위에 파도가 부서지는 것처럼, 생각을 한계 짓고 있던 틀들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호카곶에서의 강렬한 경험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사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못 찾았다.
미해결 상태이지만 굳이 그럴듯한 답변을 찾아서 결론을 닫아두고 싶지도 않다 :-)
내가 만난 사람들
이 외에도 교환 기간 중에 내가 만난 인물들, 그들이 준 가르침이 너무 많다.
유럽 최고의 부귀영화에도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자유라고 말했던 엘리자베스 황후
바다 끝에 있는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
이상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 한 돈키호테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방 세 개를 채울 정도로 많은 연습을 했던 피카소
고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보라고 하며 작곡을 한 베토벤
불리한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항해를 했고, 마침내 대항해시대로 이끈 포르투갈의 수많은 모험가들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깊이 있는 이야기가 결국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는 것을 알려준 언니
그리고 내 가장 큰 스승 에밀리아까지💓
마무리
여러 회고록을 써오면서 항상 머릿속으로 ‘교환학생 회고록’을 염두에 뒀다.
그걸 쓰는 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기분은 어떨까.
‘벌써 교환학생 회고록이라니. 교환 기간이 끝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하는 식의 진부한 멘트를 쓸까?
눈물이 한 방울 주르르 흐르고 ‘어라.. 나.. 왜..?’ 이런 장면이 펼쳐지려나?
교환학생 회고록에 내가 교환에서 느낀 모든 것을 담아내야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6개월간 느낀 많은 것들은 하나의 글에 담길 수 없는 분량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올해의 추가된 목표를 말하자면,
올해 안에 교환학생 동안 쓴 일기를 잘 엮어 책을 만들 계획이다.
판매용이 아니라 소장용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책으로 남겨두고 싶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내가 무슨 생각들을 하고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들려드리고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니코스 카잔스키가 조르바와 헤어지고 몇십 년 뒤에 쓰인 거라고 한다.
그 순간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동안 조르바에 대한 기억이 발효되며(?) 그때를 서술했기 때문에
그런 명작이 나온 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내가 쓴 일기를 잘 옮기고 또 지금의 내 생각을 붙여 책을 쓰려 한다.
올해 안에 집필 후기를 쓸 수 있기를 바라며.. 여기서 회고록을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