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단편집에 실린 첫 번째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독후감입니다.
<줄거리>
이 단편은 데이지가 소피에게 쓰는 하나의 편지이다. 데이지는 '마을'을 떠났고 편지로 소피에게 마을을 떠난 이유를 설명한다. 데이지는 평소 '마을'에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보다 아이가 많은 마을.
성년이 되면 순례의 길을 오르는 전통.
그리고 그 순례 끝에 돌아오는 건 처음의 절반이 되지 않는 순례자들.
몇명의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마을 사람 모두가 그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
순례자들이 돌아올 때 아이들에게 정체모를 음료를 마시게 한다는 것 등..
하지만 결정적으로 순례에서 돌아온 한 남자가 슬프게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데이지는 자신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한번도 느껴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워서 슬픔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데이지는 순례자들이 다녀온 곳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더욱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 뒤뜰에 금서 구역이 있을거라고 짐작해뒀던 데이지는 금서 구역으로 찾아가고 그곳에서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된다. 소피가 그곳에서 본 것은 마을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올리브의 기록이었다. 올리브는 '나를 너무 사랑한 릴리가 이 마을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기록을 시작한다. 올리브는 자신의 어머니 릴리가 자신과 마을을 만든 이유를 찾기 위해 지구로 떠났고 거기서 알게 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릴리 다우드나. 그녀는 얼굴에 커다란 얼룩이 있는 유전병을 가진채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마침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바이오 지식을 가지게 된다. 유전자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은 그녀였지만, 어느 날 돌연 '바이오 해커'로 변한다. 바이오 해커란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사람을 말한다. 부모가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를 갖고 싶으면, 바이오 해커에 의뢰해 예체능 유전자를 증폭시키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다.
유망한 생명공학자 릴리가 바이오해커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얼굴에 큰 얼룩이 생기는 유전병으로 많은 절망을 겪어왔다. 그래서 가장 좋은 유전자들로 이뤄진 배아를 만드는 것이 태어날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이오 해커중에서도 릴리의 솜씨는 가장 뛰어나서 많은 부모들이 릴리에게 배아를 의뢰하였고, 릴리는 수백, 수천 명의 유전자를 조작해 결점이 없는 '신인류'를 만들어냈다. 신인류는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며, 질병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릴리에게 의뢰할 수 있는 부자들은 신인류가 되고, 의뢰하지 못했거나 돌팔이 해커에게 의뢰했다가 실패한 아이들은 외곽으로 분리되었다.
수많은 배아를 만들던 중 릴리는 자신의 아이가 가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배아에게 가장 좋은 유전자들을 선별하여 선물해줬다. 하지만 배아가 크는 과정에서 릴리는 오류를 발견하고 말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얼굴이 얼룩으로 덮이는 유전병이 배아에서도 발현되고 만것이다. 이를 단순 오류로 여겨 그 배아를 없애 새로운 배아를 만들면 되는 문제였지만, 릴리는 그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얼굴의 얼룩 때문에 배아를 지우는 행위는 릴리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릴리는 자신의 분신에게 스스로를 겹쳐보았다. 결점을 가진 채로 태어났음에도 스스로의 삶의 기능을 입증했던 릴리 다우드나.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얼굴에 얼룩이 있어도, 팔이 하나 없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마을'을 만들고자 했다. 모두가 영원히 행복한 마을을. 그렇게 올리브가 태어났고, 비정상적으로 행복한 마을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올리브의 기록은 끝이 났다. 데이지는 기록을 다 읽고 새로운 질문을 갖게 되었다. '올리브는 마을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계속 지구에 남아있을까? 돌아오지 않은 순례자들은 왜 계속 지구에 남은 걸까?' 라는 질문이었다. 지구에 남으면 외곽에 분리되어 차별과 절망을 경험할 것이다. 지구에선 올리브의 얼굴을 무시하고 경멸했지만, 마을에선 하나의 특징일 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지구가 더 힘들고 고통받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구에 남은 순례자들은 매년 존재했다. 그들이 지구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데이지는 그 해답을 올리브의 무덤 묘비에서 찾았다. 올리브의 무덤에는 '그녀의 사랑은 여기 잠들고 그 결실은 후에 올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 마을에선 모두가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할 수 없었다. 모두 같게 프로그래밍되어진 그들은 서로에게 성애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구에서 사랑하는, 혹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곧 분리주의(신인류와 일반인들을 분리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어머니인 릴리가 만든 분리주의를 바로잡는 것이 자신이 할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올리브는 마을에 '순례'라는 전통을 만들었다. 마을의 아이들에게도 지구를 보여주어 지구와 마을 중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몇명의 순례자들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들을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마을'. 그리고 그녀가 만든 또 다른 세계인 '분리주의'. 그 간극을 메꿔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순례자들은 지구에 남았다.
모든 의문을 해결한 데이지는 자신도 지구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편지의 끝에서 데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하이라이트>
릴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임을 증명하는가?'
릴리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치 않았던 존재로 태어난 릴리. 세계에서 배제된 릴리.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기능성을 입증한 릴리 다우드나.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느낀점>
사랑의 미화
정말로 사랑 때문에 지상낙원을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요즘 나의 감성이 매말라 있어서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설령 천년의 사랑을 해봤다고 하더라도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 같다. 삶이 고단해질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인생을 선택한다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모든 탄탄대로를 버리고 고생의 길로 갈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데이지와 올리브는 참된 고생을 안 해봤어서 고생을 만만하게 본건 아닐까? 가진 돈의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들이 처음에는 '돈은 사랑을 방해할 수 없어'라며 사랑을 시작했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냥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더 위험한 길을 가다니 사랑이란 정말 멋진 것이야!!!'라고 사랑을 예찬하기엔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미워할 수 없는 릴리
사실 배아의 유전자 조작은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주제이다.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생명 탄생의 숭고함이 짓밟히는 것은 아닌가?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우월한 유전자를 갖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열등한 유전자를 갖게되는게 아닌가? 등등의 논란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릴리가 시작한 바이오 해커도 결과적으로 열등한 유전자를 외곽으로 분리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릴리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 받는 아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전자를 조작했다. '가장 좋은 유전자를 주는 것은 태어날 아이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문장 자체만 보면 릴리의 생각을 반박할 수 없는 것 같다. 재능으로든, 외형으로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차별이 존재한다. 태어날 아이들에게 차별받지 않는 삶을 선물하고 싶었던 릴리의 마음을 생각하면 릴리는 정말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인 것 같다.
총평
비현실적으로 낭만적인 소설이었다. 그렇기에 '이건 현실성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들도 있었지만, 가끔 이렇게 낭만적인 소설을 읽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릴리의 사랑, 올리브의 사랑을 보여주고 데이지가 혼자 결론을 맺는 과정이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 것 같아서 완성도가 높다고 느껴졌다! 또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예쁜 문장들이라 읽으면서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라는 문장을 읽고 한동안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배아의 유전자 조작, 차별, 사랑 등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서 'SF 소설 인척 하는 철학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문장도 좋고 메시지도 좋고 마음도 따뜻해지는 책인 것 같아서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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